2024년 개봉한 영화 [그녀가 죽었다]는 김세휘 감독의 데뷔작으로, 디지털 시대의 인간 소외, SNS 속 자아의 허상, 그리고 관음과 공감의 경계에 대한 문제를 스릴러 장르로 풀어낸 작품입니다. 한 사람의 죽음을 둘러싼 미스터리 구조 속에 감춰진 것은 단순한 범죄의 진실이 아니라, 자기 존재에 대한 집요한 탐구입니다. 이 영화는 표면적으로는 SNS 인플루언서 한소라의 죽음을 둘러싼 미스터리를 다루고 있지만, 점점 이야기가 깊어질수록 등장인물들의 심리적 허상, 자아의 분열, 그리고 현대인의 정체성 위기를 고찰하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특히 이 영화는 관음증적인 시선이 죄인가, 이해의 시발점인가라는 윤리적 질문을 던지며, 관객을 단순한 감상자가 아닌 내면의 목격자로 만든다는 점에서 독특합니다.
등장인물
구정태(변요한)
소극적이고 기괴한 취미를 가진 공인중개사입니다. 그는 집을 임대해 주는 고객의 공간을 몰래 드나들며 타인의 삶을 엿보는 데서 위안을 느낍니다. 하지만 이 병적인 관음은, 그가 타인과 진짜로 연결될 수 없는 고립된 존재라는 걸 방증합니다.
한소라(신혜선)
SNS상에서 화려한 삶을 사는 듯 보이는 인플루언서입니다. 그러나 그녀의 실제 삶은 외로움과 가짜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현실과 온라인 정체성의 괴리 속에서 점점 무너져가는 인물입니다. 영화는 그녀를 '죽은 사람'으로 등장시키지만, 이야기의 중심에 그녀가 살아 움직입니다.
오영주 형사(이엘)
강단 있고 직관적인 형사입니다. 그녀는 구정태를 유력한 용의자로 추적하면서도, 그의 눈에 담긴 무언가를 예리하게 포착하려고 합니다. 진실을 좇는 방식이 단지 범인을 찾기 위함만은 아니라는 점에서 인물적 깊이가 더해집니다.
줄거리
공인중개사 구정태는 타인의 사생활을 엿보는 병적인 취미를 지닌 인물입니다. 그는 자신이 중개한 한 인플루언서 여성, 한소라의 일상을 몰래 들여다보며 심리적인 위안을 얻습니다. 소라의 완벽해 보이는 삶은 정태에게는 동경의 대상이자, 그가 가질 수 없는 세계의 표상이기도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정태는 한소라의 집을 몰래 찾았다가 그녀가 죽어 있는 장면을 목격하게 됩니다. 경황없이 빠져나온 그는 이 사건에 연루될 것을 두려워하지만, 곧이어 누군가로부터 '네가 그 집에 들어간 걸 알고 있다'는 협박을 받기 시작합니다. 이후 형사 오영주가 사건 수사에 나서고, 정태는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됩니다. 더 이상 도망칠 수 없게 된 정태는 오히려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소라의 SNS를 추적하며, 그녀의 일상 속에 숨겨진 비밀을 하나씩 들춰냅니다. 정태가 찾은 것은 단순한 타살이나 자살의 진실이 아닙니다. 그는 그녀가 겪었던 외로움, 두려움, 그리고 사랑받고자 했던 뒤틀린 욕망을 조금씩 체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 모든 과정은 정태에게도 내면의 성찰과 현실을 직시하도록 강요하는 여정이 됩니다.
분석: 외로운 사람들의 스릴러, SNS 이면의 관음증
1. 'SNS 감성'의 이면: 가짜 삶과 진짜 고통의 대비
영화는 죽은 여자 한소라가 인스타그램을 통해 남긴 사진과 영상, 글들을 주요 단서로 활용합니다. 이 SNS 피드는 마치 그녀의 완벽한 삶을 보여주는 듯하지만, 실제 그녀의 삶은 정반대였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겉과 속이 다른 인물이라는 플롯을 넘어서, SNS에서 자아를 꾸미는 현대인의 이중성을 비판하는 구조로 읽을 수 있습니다. 특히 주인공 구정훈이 그녀의 피드를 통해 '그녀의 삶을 동경'하게 되는 지점은 현대인의 감정 이입 방식이 얼마나 외적인 이미지에 치우쳐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는 단순한 스릴러가 아닌, '관음의 도구로서 SNS'라는 철학적인 주제를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독특합니다.
2. 일방적인 연애 판타지
영화 속 구정훈은 한소라를 실제로 알지 못하면서도, 그녀의 삶에 깊게 개입하고 감정을 품게 됩니다. 이건 단순한 스토킹을 넘어서, 일방적인 감정 투영이 만들어낸 '가짜 연애 서사'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이런 감정적 유대는 보통 멜로 장르에서 등장하지만, 이 영화에선 관계 망상으로 비틀어지면서 보는 사람에게 불편함을 줍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상상한 한소라'를 사랑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일방적인 감정 소비의 위험성을 드러내는 독특한 장치입니다.
3. '감시자'에서 '해결자'로의 전이: 죄의식의 윤리적 무게
구정훈은 처음엔 단순한 관음자로 보이지만, 사건이 전개되며 점점 자신이 본 것을 외면할 수 없게 됩니다. 결국 그는 목격자, 방관자, 수사자를 거쳐 일종의 구원자 역할로까지 변화합니다. 이는 일반적인 스릴러 구조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전개인데, 관찰자의 시점이 윤리적 행동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정교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습니다. 또, 이것은 현대 사회에서 '정보를 소비만 하는 사람들(관찰자)'이 '어디까지 책임을 져야 하는가?'라는 질문과도 연결됩니다.
4. 도심 속 폐쇄공간의 공포 미학
이 영화는 시종일관 좁은 공간(반지하 원룸, CCTV가 달린 아파트, 엘리베이터, 비좁은 복도)등을 활용해 심리적 압박감을 줍니다. 하지만 흥미로운 점은, 이 공간들이 보호막처럼 느껴지기도 하다가, 순간적으로 가해자의 영역으로 바뀌는 장면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즉, 공간이 은신처와 위협 사이를 끊임없이 오간다는 점에서, 단순한 공간 연출을 넘어선 감정적 배경의 기능성을 지닌 미장센입니다.
감상평
[그녀가 죽었다]는 단순한 스릴러를 넘어선 심리적 탐구를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열쇠를 이용해 타인의 집에 몰래 들어가 물건 하나를 훔치고, 그것을 마치 예술품처럼 진열하는 공인중개사 구정태. 이 기이한 악취미는 불법임에도 불구하고 정태가 그 안에서 어떤 대리 만족이나 정서적 공허를 채우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그렇게 그는 스스로는 타인을 해치지 않는 선의의 관찰자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이야기는 곧 그가 눈을 떼지 못하는 인물, SNS 인플루언서 한소라를 중심으로 급격히 어두워지고 뒤틀려갑니다. 이 영화의 흥미로운 지점은 바로 '스토커'라는 낙인이 얼마나 쉽게 뒤바뀔 수 있는지, 또 '관찰자'와 '연기자'가 바뀌며 서로를 함정에 빠뜨리는 관계의 역전입니다. 초반에는 구정태의 병적 행동에만 집중하게 되지만, 극이 후반부로 치달을수록 더 섬뜩한 인물은 오히려 한소라가 되어 갑니다. 그녀는 SNS의 완벽한 이미지 뒤에 각종 사기와 조작, 심지어 살인까지 숨긴 인물로 그려지며, 결국 스스로를 죽은 척 연기하고 타인을 살인자로 몰아가는 치밀한 자작극의 주체가 됩니다. 한소라의 이중성과 구정태의 도착적인 관음증은 이 영화의 중심을 이루는 양 극단입니다. 어느 쪽도 전형적인 '피해자'나 '가해자'로 정의할 수 없을 만큼, 모두가 타인을 조종하거나 이용하며 나락으로 떨어집니다. 소라가 저지른 범죄는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그 이면에 깔린 '불안한 정체성'과 '사회의 시선에 짓눌린 존재감' 역시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녀는 선한 사람으로 보이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혀 결국 자신조차 통제하지 못하는 괴물이 되고 맙니다. 정태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범죄자'이긴 하지만 '피해자'이기도 한 애매한 지점에 머무릅니다. 그를 옹호하기엔 분명한 범법 행위들이 있지만, 동시에 그는 그 누구보다 소라의 실체를 꿰뚫어 본 인물이자, 마지막엔 목숨을 걸고 그녀의 죄를 드러낸 인물이기도 합니다. 이 영화가 진정으로 뛰어난 점은, 관객이 어느 순간부터 이 둘 중 누구의 편에도 서기 어려워진다는 데 있습니다. 영화는 명확한 도덕적 구획을 허락하지 않으며, 관객을 불편하게 만드는 쪽을 선택합니다. 누구도 완전히 무고하지 않으며, 누군가의 이미지와 진실 사이에는 항상 커다란 간극이 존재함을 잔혹하게 드러냅니다. 특히 인상적인 장면은, 정태가 '스토커'이자 '관찰자'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뒤틀어 다시 한소라를 역으로 함정에 빠뜨리는 후반부입니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단순한 스릴러를 넘어, 응시에 대한 철학적 질문으로 확장됩니다. 누군가를 끊임없이 관찰하고 기록하고 이미지화하는 시대, 진실은 언제나 피사체가 아니라 관찰자의 시선 속에서 비틀어집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소라는 감옥에서도 여전히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믿으며 카메라 앞에서 웃고, 정태는 가석방되어 다시 예전의 일상으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영화는 둘 다 결코 과거로 돌아갈 수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사회가 만든 괴물이며, 동시에 서로가 서로를 괴물로 만든 존재들입니다. [그녀가 죽었다]는 단순한 스릴러나 반전극에 머물지 않습니다. 이 영화는 '보이는 것'과 '실제의 나' 사이에서 분열되는 현대인의 내면을 강박적이고 병적인 인물들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관객은 그들을 혐오하면서도 어느새 이들의 모순과 욕망에 공감하게 되며, 그 뒤틀린 감정이 영화가 남긴 가장 짙은 그림자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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