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카니 감독은 '원스(Once)'에 이어 또 한 편의 음악 영화를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2014년작 [비긴 어게인(Begin Again)]은 화려한 성공이나 드라마틱한 반전 대신, 상처 입은 사람들이 조용히 다시 일어서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삶의 구석에서 버려진 듯한 두 인물이 음악을 통해 서로를 구원하고 또 스스로를 구원해 나가는 이 이야기는 뉴욕이라는 도시의 거칠고도 따뜻한 숨결을 배경으로 펼쳐집니다. [비긴 어게인]은 인생이 틀어지고 모든 걸 잃었다고 느껴질 때 우리는 어디서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그리고 누군가의 구원이 아니라 스스로의 힘으로 다시 노래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등장인물
그레타(키이라 나이틀리)
그레타는, 조용하지만 단단한 내면을 지닌 싱어송라이터입니다. 한때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음악을 만들며 세상과 소통하고자 했지만, 그 모든 꿈은 한순간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연인인 데이브가 성공의 궤도에 오르면서 변해버린 것입니다. 버림받은 뒤에도 그레타는 자신의 목소리를 잃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합니다.
댄(마크 러팔로)
과거 한때는 업계 최고의 음반 프로듀서로 이름을 날렸던 남자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삶의 무게에 짓눌려 술과 자괴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인물입니다. 이혼한 아내와 사춘기의 딸과도 소원해진 그는 이제 더 이상 세상에 필요한 존재가 아닌 듯 느껴집니다. 그런 그가 그레타의 음악을 듣는 순간 다시 한번 가슴 깊숙이 묻어두었던 열정을 떠올립니다.
데이브 콜(애덤 르빈)
한때는 진심으로 음악을 사랑했던 뮤지션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공과 명성 앞에서 방향을 잃어버린 그는 이제 더 이상 그레타와 같은 길을 걸을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바이올렛(헤일리 스테인펠드)
비올렛은 댄의 딸입니다. 반항적이고 거칠게 세상과 거리를 두려 하지만 어딘가에는 여전히 아버지의 손길을 기다리는 아이이기도 합니다. 그녀 역시 이 여정 속에서 조금씩 마음을 열어가게 됩니다.
그레타와 댄의 관계
그레타와 댄은, 처음부터 특별한 인연으로 얽힌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각자의 삶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는 중이었습니다. 그런 두 사람이 서로를 알아본 건, 서로가 가진 '결핍' 덕분이었습니다. 그레타는 누군가의 성공을 위해 희생당하는 삶을 거부한 여인이었고, 댄은 세상과의 전쟁에서 지고 주저앉아 버린 남자였습니다. 그들은 사랑에 빠지지 않지만 그보다 더 깊은 무언가를 공유하게 됩니다. 자신을 잃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용기, 그리고 그 과정에서 서로를 지지해 주는 우정입니다. 댄은 그레타에게 음악을 통해 세상과 다시 연결되는 방법을 보여주고, 그레타는 댄에게 잃어버린 열정과 믿음을 다시 불어넣습니다. 그들은 의존이나 서로를 구원해 주는 관계가 아닙니다. 각자가 자신의 삶을 살아가지만 때로는 서로에게 등불이 되어주는 그런 관계입니다. 특히 영화의 마지막 댄이 그레타의 음반을 독립적으로 발매하자는 제안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장면은 인상적입니다. 그레타의 선택을 존중하고 자신의 이해관계나 욕심보다 그녀의 자유를 응원하는 모습은 그들의 관계가 얼마나 건강하고 성숙한 지를 보여줍니다. 어쩌면 '비긴 어게인'이라는 제목은 이 두 사람이 서로에게 건넨 작은 축복 같은 말일지도 모릅니다. "너는 다시 시작할 수 있어.", "나도 다시 시작할 수 있어." 두 사람은 서로의 삶에 조용히 손을 얹어주는 그런 존재가 된 것입니다.
줄거리
이야기는 뉴욕의 어느 어둑한 바에서 시작됩니다. 초라한 무대 위 조심스럽게 기타를 잡은 그레타는 누구에게도 크게 환영받지 않는 무대에서 작게, 그러나 진심을 담아 노래를 부릅니다. 그 노래는 우연히 그곳에 들른 댄의 마음을 울리게 됩니다. 모든 것을 잃고 방황하던 댄은 그레타의 음악 속에서 어떤 가능성을 봅니다. 다시 살아갈 이유를, 다시 만들어가야 할 무언가를 발견한 것입니다. 댄은 그레타에게 이 도시와 거리의 모든 숨소리를 담은 앨범을 만들어 보자고 제안합니다. 처음에 그레타는 망설이지만 점차 마음을 열고 둘은 뉴욕 곳곳에서 앨범을 녹음하기 시작합니다. 붐비는 거리 한복판에서, 고요한 지하철 플랫폼에서, 바람 부는 옥상 위에서, 아이들이 뛰노는 공원에서 그들은 노래를 부릅니다. 이 과정은 단순히 음반을 만드는 작업 그 이상입니다. 그레타는 과거와 완전히 결별하고 자신만의 목소리를 찾아가는 여정을 시작합니다. 댄 역시 음악을 통해 딸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잊고 있던 삶의 열정을 다시 불러냅니다. 한편, 성공한 뮤지션이 되어버린 데이브는 그레타와 다시 마주하게 됩니다. 하지만 둘의 간극은 이미 너무 멀어져 있습니다. 그레타는 더 이상 데이브의 그림자가 아닌, 자신의 길을 걸어가기로 결심합니다. 결국 그들은 세상의 기대도, 과거의 후회도 모두 내려놓고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음악과 인생을 시작해 나갑니다. 거창하지는 않지만, 진심 어린 그 시작은 보는 이의 마음을 오래도록 울립니다
OST와 비하인드 스토리
OST해설
[비긴 어게인]의 음악은 단순한 삽입곡이 아닙니다. 노래들은 등장인물들의 감정, 영화의 서사와 완벽하게 호흡하며 하나의 살아 있는 이야기로 기능합니다. 가장 핵심이 되는 곡은 단연 'Lost Stars'입니다. 이 노래는 '길을 잃은 별'이라는 제목처럼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데이브가 부른 버전은 화려하고 완성도가 높습니다. 그는 이미 주류 음악 산업 속에 편입된 존재로서 'Lost Stars'를 대중적으로 매끈하게 다듬어 부릅니다. 하지만 그의 노래에서는 어딘가 씁쓸한 공허함이 느껴집니다. 화려한 무대 조명 아래 있지만, 진짜 자신은 점점 멀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그레타가 부른 'Lost Stars'는 조용하고 서툴지만 가슴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진심을 담고 있습니다. 그녀는 외롭고 두렵지만 여전히 별을 찾아가려는 의지를 잃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버전은 "우리는 누구나 불완전하고 방황하지만, 그래도 사랑받아 마땅한 존재"라는 메시지를 조심스럽게 건넵니다. 'Like a Fool'은 그레타가 데이브와의 관계를 정리하면서 부르는 곡입니다.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을 믿었던 자신의 순진함을, 그러나 그 믿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자신의 마음을 담아냅니다. 이 곡을 통해 그레타는 자신의 과거를 부정하지 않고 온전히 받아들이는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Tell Me If You Wanna Go Home'은 이제 진짜 자신의 길을 가려는 그레타의 결심을 상징합니다. 타인에게 묶여 있던 삶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위해 문을 열고 세상 밖으로 걸어 나가겠다는 다짐이 담겨 있습니다.
이렇게 [비긴 어게인]의 OST들은 단순한 배경 음악이 아니라 각 인물의 성장과 변화,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삶의 리듬을 고스란히 품고 있습니다. 음악은 끝내 사람들을 구원하지 않습니다. 대신, 사람들 스스로가 자신을 구원할 때까지 곁을 지켜주는 조용한 친구처럼 곁에서 흐릅니다.
비하인드 스토리
[비긴 어게인]은 처음부터 거대한 제작비나 스튜디오의 지원을 받은 작품이 아니었습니다. 감독 존 카니는 '원스'에서 그랬듯, 이번에도 적은 예산과 진심만을 무기로 영화를 만들어냈습니다. 가장 눈에 띄는 비하인드 중 하나는 뉴욕 거리에서 실제로 촬영을 했다는 점입니다. 대부분의 거리 장면들은 허가를 받고 통제된 상황에서 촬영된 것이 아니라 진짜 뉴욕 시민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며 찍었습니다. 그래서 영화 속 거리의 소음과 사람들의 움직임은 모두 '진짜'입니다. 조작되지 않은 생생한 분위기가 영화의 자연스러움을 더해줍니다. 특히 댄과 그레타가 거리 곳곳을 다니며 노래를 녹음하는 장면은 모두 실제로 현장에서 바로 찍은 것입니다. 때문에 촬영 당시 예상치 못한 소음이나 돌발 상황도 많았지만 감독은 그 모든 것들이 영화의 '진짜 느낌'을 살린다고 판단해 오히려 적극 활용했습니다. 또 하나 흥미로운 사실은 키이라 나이틀리가 직접 모든 노래를 불렀다는 점입니다. 키이라는 본래 뮤지컬 배우도 아니고 전문 가수도 아니었지만 영화의 진정성을 살리기 위해 별도의 대역 없이 본인이 직접 녹음을 했습니다. 촬영 전 6개월 동안 보컬 트레이닝을 받으며 기타 연습도 병행했다고 합니다. 그녀가 부른 'Lost Stars'나 'Tell Me If You Wanna Go Home'의 담백한 느낌은, 이런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마크 러팔로 역시 댄이라는 인물을 연기하기 위해 별도의 음반 프로듀서와 인터뷰를 하며 업계 생리에 대해 공부했습니다. 그는 이 작품을 "가장 인간적인 영화 경험 중 하나"라고 표현했습니다. 한편, 감독 존 카니는 훗날 인터뷰에서 "큰 예산과 스타 캐스팅이 주는 어려움"을 솔직하게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비긴 어게인]은 '원스'보다 훨씬 큰 스케일로 만들어졌지만, 그만큼 타협해야 하는 부분도 많았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음악과 감정의 진심을 잃지 않으려고 끝까지 버텼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영화는 거대한 시스템 속에서도 작은 진심이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는지를 그 자체로 증명한 작품이 되었습니다. 또 하나 [비긴 어게인]에서 가장 흥미로운 캐스팅 중 하나는 바로 마룬 파이브의 리드 싱어, 애덤 리바인의 출연입니다. 애덤 리바인은 이 작품을 통해 본격적으로 영화 연기에 도전했습니다. 그가 맡은 역할 '데이브 콜'은 초반에는 순수한 싱어송라이터였지만 성공을 거머쥔 뒤 점점 변해가는 뮤지션입니다. 애덤 리바인은 실제로 뮤지션이기 때문에 이 캐릭터에 놀라울 정도로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 있었습니다. 그의 자연스러운 카리스마, 무대 장악력, 그리고 어딘가 현실적인 모습까지 데이브라는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만들었습니다. 특히 그가 직접 부른 영화 OST 'Lost Stars'는 영화 내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데이브 버전의 'Lost Stars'는 그레타 버전과 대조되면서 상업성과 진정성 사이에서 길을 잃어버린 인물을 보여주는 장치가 됩니다. 흥미로운 점은, 애덤 리바인이 실제로도 이 노래를 매우 애정했고 영화 이후 공식 사운드트랙 앨범을 통해 'Lost Stars'를 세계 무대에서도 선보였다는 것입니다. 영화가 끝난 후 이 곡은 마룬 파이브 팬들 사이에서도 꾸준히 사랑받는 곡이 되었습니다. 한편 애덤 리바인은 이 영화 촬영에 대해 "평생 잊지 못할 경험이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촬영 당시 한 인터뷰에서 "연기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지만, 이 캐릭터는 나와 너무 비슷해서 자연스럽게 따라갔다"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 음악과 연기가 어우러지는 현장이 그에게도 큰 영감을 준 셈입니다.
감상평
[비긴 어게인]은 조용하지만 힘 있는 영화입니다. 화려한 성공도 기적 같은 반전도 없습니다. 대신 상처 입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다독이며 다시 일어서는 모습을 아주 조심스럽고 섬세하게 보여줍니다. 가장 인상 깊은 부분은, 영화가 ‘재기’라는 목표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레타와 댄은 누구에게도 증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은 그냥 자신을 구하기 위해 노래하고, 다시 삶을 살아가기 위해 움직입니다. 그 모습은 때로 초라해 보이지만, 그래서 더 아름답습니다. 음악은 이 영화의 중요한 매체입니다. 노래들은 단순한 배경음이 아니라 등장인물들의 감정 그 자체를 대변합니다. 'Lost Stars'는 특히 깊은 인상을 남깁니다. 같은 곡이지만 데이브의 화려한 버전과 그레타의 조심스러운 버전은 전혀 다릅니다. 성공을 갈망하는 데이브와 진심을 지키려는 그레타 사이의 차이를 이 한 곡이 오롯이 보여줍니다. 또한 뉴욕이라는 도시는 단순한 배경이 아닙니다. 불완전하고 거친 이 도시의 소리와 분위기는 그레타와 댄의 불완전한 삶과 절묘하게 겹쳐집니다. 거기서 탄생하는 음악은 세련되지 않았지만 그래서 오히려 살아있고 진짜입니다. [비긴 어게인]은 실패를 두려워하는 이들에게 상처투성이에 모든 걸 잃었다고 느껴질 때조차, 삶은 계속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언제든 다시 노래를 시작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다시 시작할 때 비로소 우리는 진짜 우리 자신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영화 어떠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