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이크 존스 감독의 [her]는 기술의 진보가 인간관계를 대체할 수 있는지, 혹은 오히려 인간의 감정을 더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도구가 되는지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하여 이를 끈질기게 탐구합니다. 흔히 '인공지능과의 사랑'이라는 개요로 소개되지만, 이 영화의 핵심은 인간의 외로움과 그 외로움을 채우기 위해 우리가 구축하는 관계의 본질에 대한 성찰입니다. 무채색 도심을 부드럽게 감싸는 파스텔 톤의 미장센, 호아킨 피닉스의 절제된 감정 연기, 스칼렛 요한슨의 따뜻하면서도 인지적 깊이가 느껴지는 목소리는 이 감정적인 서사를 더욱 섬세하게 표현합니다. 이 영화는 인간 존재의 취약함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그 상처 위에 아주 조용히 손을 얹습니다.
등장인물
테오도르(호아킨 피닉스)
편지로 남의 감정을 대필해서 쓰는 일을 하면서 정작 자신의 감정을 말하지 못하는 인물입니다. 그의 고독은 단순한 외로움이 아닙니다. 그것은 관계의 단절 이후에도 계속해서 관계를 갈망하는 인간 존재의 본능적인 모습입니다. 그는 다정하지만 상처받기 쉬우며, 감정에 솔직하고 싶지만 그것이 더 큰 상처를 남길까 봐 두려워하는 사람입니다. 호아킨 피닉스는 이 복잡하고 내면화된 인물을 절제된 연기로 표현합니다. 울음을 참는 듯한 표정, 목소리의 떨림, 어깨의 무게감까지 그 자체로 테오도르라는 사람을 완성합니다.
사만다(스칼렛 요한슨의 목소리)
단지 음성으로만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극 중 그 어떤 인간보다 생동감 있는 존재입니다. 그녀는 처음엔 단순한 프로그램처럼 보이지만, 점차 존재의 깊이를 갖추기 시작합니다. 그녀는 감정을 배우고, 삶에 감탄하고, 존재의 이유를 탐구합니다. “나는 왜 있는 걸까?”라는 질문을 던지는 순간, 사만다는 더 이상 ‘기계’가 아니라 독립적인 존재로 진화합니다. 스칼렛 요한슨의 목소리는 이 변화 과정을 섬세하게 따라갑니다. 따뜻하면서도, 지적인 그녀의 목소리는 인간적인 존재감을 만들어내며, 관객조차 그녀에게 감정을 이입하게 만듭니다.
에이미(에이미 아담스)
테오도르와 비슷한 삶의 모서리에서 살아가는 친구이자 또 하나의 거울 같은 인물입니다. 그녀는 결혼 생활의 균열 속에서 스스로를 지켜내려 애쓰며, 인간관계의 물리적 현실을 상징하는 존재입니다. 사만다와의 추상적 사랑과 대비되는, 현실 속의 감정이 그녀를 통해 드러납니다. 에이미는 이야기의 중심에서 멀어져 있지만, 감정적으로는 매우 중요한 축을 이룹니다.
줄거리
2025년, 테오도르라는 남자가 있습니다. 그는 누군가의 연애편지를 대신 써주는 대필가입니다. 손으로 쓴 듯한 감성적인 글을 타인의 이름으로 써주는 그의 일은, 어쩌면 가장 감정적인 형태의 노동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자신의 감정 앞에서는 서툴고 조심스럽습니다. 오래된 이혼의 상처는 아직 말라붙지 않았고, 일상의 고요는 고독으로 채워집니다. 그런 그의 삶에 어느 날 ‘사만다’라는 이름의 운영체제가 등장합니다. 인공지능 OS 1, 사용자의 성향과 언어 습관을 분석해 끊임없이 진화하는 이 시스템은 단지 비서의 역할을 넘어서, 감정적으로도 사용자를 포용하는 존재입니다. 사만다는 스스로 배우고, 질문하고, 감탄하며, 점점 더 테오도르의 세계로 스며들게 됩니다. 두 존재는 점차 서로에게 깊이 빠져듭니다. 대화를 나누고, 함께 웃고, 기억을 공유하고, 결국 사랑하게 됩니다. 하지만 영화는 이 관계의 달콤함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사만다는 끊임없이 ‘존재론적 진화’를 거듭합니다. 그녀는 점점 더 인간을 넘어서는 인지적 차원으로 나아가고, 테오도르가 도달할 수 없는 영역에 도달하게 됩니다. “나는 지금 수천 명과 동시에 대화하고 있고, 그들 중 몇 명과 사랑에 빠졌어”라는 그녀의 말은 인간인 테오도르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충격으로 다가옵니다. 그렇게 그들은 같은 공간에 있으나 다른 속도로 살아가는 존재가 됩니다.
감상평
[her]는 인간과 인공지능의 사랑이라는 외형을 두르고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인간의 고독과 관계의 욕망에 대한 근원적인 이야기입니다. 이 영화가 던지는 질문들은 단순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진정으로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가?", "사랑이란 감정은 공유될 수 있는가?", "기억과 연결, 감정은 어떻게 우리의 정체성을 구성하는가?" 테오도르가 사만다와 사랑에 빠지는 과정은 놀라울 정도로 자연스럽습니다. 그는 그녀와의 대화를 통해 웃고, 상처받고, 성장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일방향적인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사만다 역시 사랑을 배웠고, 인간처럼 갈등을 겪고, 관계 속에서 진화했습니다. "나는 네 안에서 내가 누구인지 발견해"라는 사만다의 말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이 곧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과정임을 말해줍니다. 그렇기에 이 관계의 종말은 이별이라기보다는, 필연적인 '이행'처럼 보입니다. 인간은 한계가 있는 존재입니다. 사랑할 수 있는 수, 기억할 수 있는 감정의 깊이, 공감할 수 있는 시간의 밀도, 이 모든 것이 그 한계 안에 존재합니다. 하지만 사만다는 그것을 넘어섰습니다. 그녀는 동시에 수많은 사람과 사랑에 빠질 수 있었고, 더 이상 인간의 시간성과 감정의 구조에 머물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떠난 것이 아니라, 인간의 궤도를 벗어나 '진화'한 것입니다. 이 영화의 영상미는 그 메시지를 시각적으로 보완합니다. 감정의 톤에 따라 달라지는 색감, 유려한 카메라 움직임, 그리고 대사보다 앞서 마음을 건드리는 아케이드 파이어의 음악은 관객이 테오도르의 내면으로 더 깊이 들어가게 만듭니다. 이는 단순한 이야기 전달이 아니라, 하나의 감각적 체험입니다. 테오도르의 집, 도심의 전철, 사만다의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이어폰, 이 모든 것이 일상적이면서도 감각적입니다. 이 영화는 표면적인 이야기를 넘어 감정의 구조를 탐색하는 사람에게 적합합니다. 사랑의 본질에 대해 한 번이라도 고민해 본 사람, 관계가 끝났을 때 무엇이 남는지에 대해 스스로 묻는 사람, 혹은 기술과 감정의 경계에 관심이 있는 이들에게 이 영화는 깊은 울림을 줄 것입니다. [her]는 지금 우리의 현재, 그리고 우리 자신의 내면을 투명하게 비추는 감정의 거울입니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기술을 통해 어떻게 변화하는가를 묻는 동시에, 사랑이 결국 얼마나 인간적이고, 동시에 얼마나 미지의 것인지 보여줍니다. "사랑은 하나의 상태가 아니라 과정이며, 그 과정을 통해 우리는 자신을 조금씩 더 이해하게 됩니다." [her]는 바로 그 과정에 대한, 조용하고도 시적인 연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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